빨래비누
초록의 풀색이 묻고, 운동장의 흙먼지로 뽀얗게 뒤덮히고, 강물까지 스며들어 어린시절의 여름 옷은 언제나 깨끗한 적이 없었습니다. 눈을 뜨면 해는 벌써 하늘위에서 강렬한 햇빛을 내리쬐고 있고, 아무리 많이 놀아도 해는 오랫동안 머물며 놀이터 조명처럼 비춥니다.
마른 체형에다 노는 것을 좋아했던 개구쟁이는 늘 겨울방학보다는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추위를 쉽게 타는 탓에 겨울에는 밖에 나가질 못했기 때문에 밖에서 신나게 마음껏 놀 수 있는 여름방학은 1년에 한번 오는 선물처럼 반가웠습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서 축구도 하고 벌레를 잡으러 숲을 누비기도 합니다. 그러다 더위가 느껴질 때면 강가로 가서 물놀이까지 즐기며 여름천국의 혜택을 누립니다.
그래서, 여름 옷은 늘 지저분합니다. 하루동안 놀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옷에 증거처럼 남겨져 있습니다. 해가 지면 옷은 빨래비누를 문질러 물로 헹군 후 마당의 빨래줄에 걸어두면 다음날 아침에는 뽀송뽀송하게 변해있습니다.
미숫가루 색의 두툼하고 각진 빨래비누는 여름만되면 금세 납작해지고 각이 사라집니다. 뛰어노는 아이의 옷을 매일매일 뒷바라지해야 하니깐 처음의 각진 모양은 오래 버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해가지면 빨고, 다음날 또 입는 옷에는 언제나 빨래비누의 은은한 냄새가 묻혀있습니다. 그 냄새가 어린시절 여름의 향기입니다.
지난 여름에는 세탁기 선반위에서 사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쌓아둔 빨래비누를 8장 발견했습니다. 가루세제로 세탁기에 빨래를 해온 탓에 포장지 색깔이 바란 빨래비누가 먼지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릴적 포장지도 없는 빨래비누와는 달리 항균 작용을 강조하는 문구가 적혀져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빨래비누를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 포장지를 벗기고 양파망 같은 것에 모두 담고 끈으로 망입구를 단단히 묶습니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물이 가득차면 세탁기 전원을 끄고 빨래비누가 가득 들어있는 망을 담급니다. 세탁기 물에 하루정도만 지나면 비누가 흐물흐물해지면서 뽀얀 비눗물이 생겨납니다. 망속의 비누를 양손으로 문지르면 망에서 끈적한 액체처럼 비누가 새어나옵니다. 그리고 세탁기의 전원을 다시 켠 후 마무리합니다.
베란다 행거에 걸려져 있는 어른의 여름옷에도 어릴적 빨래비누의 여름이 은은하게 배여있습니다. 이 옷을 입고 평소 즐기는 운동을 나섭니다. 가루세제의 세련된 향은 아니지만 묵묵한 느낌의 빨래비누의 향을 바람이 일으켜줄 땐 개구쟁이의 여름으로 되돌아갑니다. 체력유지를 위해 나선 운동이지만 철없이 뛰어놀던 그 여름의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풀잎도 냇가의 물 흐르는 소리도 그 시절의 그대로 맑아집니다.
선반 위에 묵혀두었던 빨래비누가 마치 타임머신의 스위치처럼 지난 여름을 바꿨습니다. 지치고 힘든 여름이 아니라, 발랄하고 쉴 틈없이 뛰어놀던 그때의 여름을 다시 선물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서도, 아버지의 품에서도. 그리고 할머니의 품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고유한 향기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고 포근한 향기는 늘 가슴속에서 남아있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코로 맡는 향기가 아니라 가슴으로 맡는 향기입니다. 그립던 시절의 향기는 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빨래비누의 향기를 다시 맡은 이번 여름은 가슴속 한 켠에 묻혀만 있었던 그 여름을 꺼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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