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오솔길

 

때가 돼서 보따리를 싸고 떠날 채비를 하는 여름, 때가 돼서 보따리를 들고 찾아올 채비를 하는 가을이 만나는 요즘입니다. 끝나지 않을 듯한 무더위도 계절의 룰에 따라 내년을 약속하며 물러나는 모습에 자연의 매너를 느끼게 합니다. 아직 완전하게 떠나지 못한 더위에 가을은 이미 찾아와 있습니다. 등산로에 들어가는 오솔길에는 도토리나무가 길 따라 심어져 청솔모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고, 먹으려다 놓친 도토리는 오솔길 위에 떨어져 있었나봅니다. 

 이 오솔길에 아주머니 두분이 등산복 차림으로 손에는 검은 봉다리를 들고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더위가 남아있는 탓에 줍는 것이 가을의 도토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뭘 줍고 계세요"라며 앞서 오던 한 분에게 여쭸더니 "도토리입니다". 

 어느새 윤기가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도토리가 가을의 도착을 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쳐지나가는 대화를 하는 동안 먼저 걸어오시던 아주머니는 눈에 띄는 도토리를 모두 담진않는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뒤에 따라오시던 분의 몫을 남겨둔채 떨어져있던 도토리를 띄엄띄엄 주워서 자신의 봉다리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뒤따라 오던 분도 허리를 숙이며 도토리를 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좁은 오솔길이다 보니 마주 올 등산객이 지나갈 통로도 마련하기 위해선 두분이 옆으로 나란히 도토리를 줍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신 건지, 아니면 대화없이 조용히 각자가 가을 맞이를 하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거리를 꽤 두고 도토리 줍기에 한창이었습니다.

 앞선 분의 도토리 남겨두며 걸어가는 배려와 뒤따른 분의 앞선 분에 대한 믿음이 오솔길에서 공생의 걸음걸이를 담아냈습니다. 배려와 믿음이 없었다면 나란히 걷거나 앞서서 걸으며 많은 도토리를 손에 넣으려고 걸음을 재촉했을 겁니다. 그런 경쟁의 걸음에도 오솔길이 끝날때에는 봉다리에 든 도토리 갯수는 비슷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 분의 걸음에는 찾아온 가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배려하고 믿는 공간속에서 가을이 더욱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캠프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학생들이 자율배식으로 식판에 음식을 담고 있는데, 줄이 끝날 즘에는 뒤에 남아있는 친구들의 숫자를 가늠해서 남은 음식을 함께 나눠먹을 수 있도록 담는 음식량을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앞선 친구들의 배려와 뒤따르는 친구들의 믿음이 없다면 음식을 놓고선 무질서와 다툼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경쟁이 시작되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집니다.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인식하면 다음 경쟁에선 이기기위해 온갖 전략을 세워 치밀하게 덤벼들 것입니다.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면 결국은 절반만 손에 쥐는 것이지만 경쟁에만 몰입하게 만듭니다. 그 과정에선 경쟁을 포기하고 무능력자라며 스스로가 낙인을 찍는 사람들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두가 비슷한 양을 손에 쥘 수도 있지만, 손에 쥐기 위해선 오로지 경쟁을 통해서 이겨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앞서도 뒷사람을 생각하는 배려와 뒤따라가도 괜찮다는 믿음은 경쟁에 이미 중독된 우리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다시 찾아온 가을을 느끼며 도토리를 담아가는 두 분의 걸음걸음이 오솔길의 맑은 공기처럼 상쾌합니다.


댓글

인기 글

보이는 노래

쌀밥 맛집

퍼즐

장마와 맨발

참새와 참돔

벚꽃 본색

1000m 마라톤

나침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