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in Busan
손꼽아 기다리다가, 잠까지 설치게 만든 버스가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인생 처음으로 각오를 다지게 만드는 순간입니다. '반드시 타야한다'. 빈틈 없을 정도의 만원버스였지만, 신기하게도 정거장마다 사람들을 더 태울 수 있는 공간은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발디딜 자리도 없어 보였던 버스 안이지만, 커브길을 돌려고 속도를 늦추면 사람들 사이에 공간이 생겨 바깥 모습을 살짝 볼 수 있었습니다. 전원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는 기쁨으로 설렙니다.
눈앞엔 바다. 해운대와의 첫만남은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였습니다. 부산으로 이사를 간지 몇년이 지난 후에서야 말로만 듣던 해운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넓은 백사장과 바다에는 버스안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벌써 사람들이 빼곡합니다. 가방에서 튜브를 꺼냅니다. 밑부분은 파랑색, 윗부분은 열대어가 그려져 있는 투명 비닐의 튜브입니다. 힘껏 숨을 들이켜서 튜브에 불어넣습니다. 빵빵해진 튜브를 허리에 끼고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들어갑니다. 아버지가 튜브를 붙잡아주시긴 했지만, 바닥에 닿질 않고 물속에서 움직이는 발의 느낌이 무섭기도 했습니다.
잊고 지냈던 그 풍경과 느낌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사진 한장 덕분입니다. 고등학생때 서랍속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해운대 바다에서 나왔을때 너무 추워 오돌오돌 떨고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친구들이 여행을 가자고 했을땐 조금의 고심도 없이 "부산 가자"며 제안했습니다. 부산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해운대가 아닌 태종대에서 '부산 추억'을 쌓습니다.
그렇게 마음속 '부산 살이'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습니다. 어릴적 살던 곳을 혼자서 찾아가보기도 합니다. 긴 시간이 바꿔놓은 풍경때문에 정확한 주소를 확인하지 않고는 찾는게 불가능했지만 무작정 도전해봅니다. 골목길을 걷기만 해도 부산에 살던 그 초등학생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속의 부산을 차근히 들여다 봅니다. 어떤 장면들이 남아있길래 아직까지도 생생한 에너지를 뿜고 있는지. 장면을 모아봅니다. 그리고 하나씩 태그를 달아봅니다. 수십개의 장면들이 두개의 태그로 적혀집니다. '베품'과 '열정'.
초등학교 등교길은 미로같은 골목길이었습니다. 학교까지는 거리도 멀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많아, 입학하고 한참이나 지나서 등교길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넉넉치 못한 살림에 아침이면 생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늘 볼 수 있었습니다. 힘들게 살아도 마음은 넉넉한 장면이 있습니다. 밥때가 되면, 어머니들은 아이의 동네친구들까지 챙겨줍니다. 많지 않은 반찬이지만 금방 지은 밥을 밥공기에 가득 채워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우리는 놀다가 배고프면 함께 밥을 먹고 또 놉니다. 그렇게 형제같은 친구들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의 베푸는 손길이 '함께'라는 단어를 가르쳐줬습니다.
어른이 되고나서야 그때 어른들의 순수한 열정이 보입니다. 초등학생의 눈에는 부산은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매일 장날처럼 북적입니다. 내다놓은 생선에 파리가 앉을까봐 쉬지도 않고 부채질 하고, 작은 자전거에는 짐을 한가득 싣고 인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닙니다.
고된 삶이지만 묘한 표정이 있습니다. 힘들어도 힘든 것뿐이라는 모습입니다. 하루 하루를 밥 먹고사는 것에 집중을 합니다. 스트레스를 느낄 틈조차 없는 바쁜 일상입니다. 몸은 고되더라도 마음까지 고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절박한 생존의 길을 헤쳐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정적인 삶으로 마음의 공간에 걸림돌을 쌓아두지않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팍팍한 일상에 지치고 힘들때면 부산이 늘 안아줍니다. 마음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빈 박스들이 치워지고, 다시 생겨난 공간에는 그때의 어른들이 보여주신 베품과 열정으로 채워지는 듯합니다. 소중한 추억은 과거가 현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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